영화 <달콤한 인생>은 냉정하고 과묵한 한 남자가 마음이 흔들려 버린 후 인생이 180도 바뀐 남자의 이야기다. 이병헌의 빈틈없고 스타일리시한 액션이 눈을 사로잡고, 주인공들의 눈빛만으로도 설렘과 긴장을 그려낸 김지운 감독의 수작이다.
한 호텔의 스카이라운지를 책임지고 있는 선우(이병헌)는 보스인 강사장(김영철)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오른팔이다. '왜'라고 묻지 않고 시키는대로 깔끔하게 일처리를 한 덕분에 그 신임으로 스카이라운지 경영까지 맡게 되었다. 7년 동안 보스의 개처럼 산 결과, 지금의 자리를 놓치고 싶지 않은 선우는 보스의 편에서 조직동료 문석(김뢰하)과 타조직 백사장(황정민)에게도 미움을 산다.
강사장이 출장가는 3일 동안 자신의 어린 애인을 감시하라는 지시를 받고, 선우는 희수(신민아)의 주변을 맴돈다. 다른 남자와의 함께 있는 것을 목격한 선우는 희수의 애인을 때리고, 희수는 흐느낀다. 강사장에게 전화해야 하지만, 왜인지 선우는 전화를 끊고 '없던 일로 하자'며 상황을 정리한다.
선우에게 한 남자가 '잘.못.했.음' 네 마디를 요구하지만 선우는 '그.냥.가.라'며 무시하고, 그날 밤 선우는 누군가의 습격으로 백사장 앞으로 붙잡혀오게 된다. 그 배후에 강사장이 있었고 선우에게 "왜 그랬냐"고 묻지만 선우는 대답하지 못한다. 선우는 구덩이에 매장되지만, 그 소굴에서 가까스로 탈출한다. 백사장의 조직을 제거한 뒤, 자신이 몸담았던 조직에서 강사장을 마주한 선우는 "저한테 왜 그랬냐"며 질문을 돌려주고, 강사장은 "내게 모욕감을 줬다"고 대답한다.
흔들리는 선우의 마음
이 영화에는 도입과 맺음에 나레이션이 등장한다.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것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 뿐이다.
영화의 처음부터 등장하는 선우의 스카이 라운지는 세련되고 깨끗하며 빈틈없어 보이는 이미지다. 선우의 건조한 표정도 그가 일을 아무 감정없이 처리하는 사람임을 보여준다. 그런 그를 신뢰하는 강사장이 맡긴 3일 간의 임무가 그의 인생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희수를 만난 이후, 흔들려 버린 마음은 바람에 흩날리는 버드나무처럼 멈출 수가 없다. 시작된 마음의 변화는 다른 모든 것이 멈춰도 멈춰질 수 없는 것이다. 이병헌은 자신이 살아온 삶과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을 빼앗겼을 것이다. 어떤 대화도, 모션도, 교감도 없이 피어나는 마음은 준비없이 출발해 버린 것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 달콤한 꿈
영화의 마지막에도 나레이션이 등장하는데, 이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의 독백은 무척이나 슬프다.
어느 깊은 가을밤, 잠에서 깨어난 제자가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스승이 기이하게 여겨 제자에게 물었다.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슬픈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슬피 우느냐?" 제자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나지막히 말했다. "그 꿈을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선우는 달콤한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지만 품어버린 마음은 어쩔 수 없는 것. 강사장은 이미 흔들려버린 선우의 마음을 눈치챘고, 이전과 다른 일처리를 보며(단 한번의 실수) 7년 동안 심복이었던 선우를 버린다. 그리고 '모욕감'이라는 애매하고 불분명한 말로 자신의 결정을 합리화한다. 강사장은 스스로도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아내도 있고 애인도 있는 강사장은 선우의 흔들린 마음을 눈치챘기 때문에, 더이상 그를 신뢰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사사로운 감정이 행동의 변화를 통해 드러난 순간, 그 마음은 이미 그 사람 자체이기 때문이다.
희수의 존재감
극중 희수(신민아)는 초반 몇 씬에 걸쳐 등장한다. 희수를 차로 데려다 주고, 같이 점심식사를 하는 등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것이 다지만 병헌은 자신이 사는 세상과 다른 모습의 희수를 신기해 한다.
사랑해 본 적 있어? 없어, 넌 없어. 그래서 너한테 이런 일을 맡기는 거야. 그래서 널 좋아하는 거야.(강사장의 대사)
처음 본 거다. 이런 사람을.
그래서 자신의 마음에 일어나는 변화가 무엇인지 짐작조차 못한 것이다. 그냥 스며들었을 뿐.
그래서 선우는 강사장이 물어볼 때, 아무것도 대답하지 못한 것이다. 진짜 뭘 잘못했는지 모르니까.
강사장은 절대 흔들릴 것 같지 않은 선우를 믿고, 희수를 부탁한다.
처음 희수 집 앞에 선물을 들고 차에서 내렸을 때, 강풍처럼 불어오는 바람에 선우는 잠시 몸을 멈춘다.
불어오는 것은 피할 수 없고, 그냥 맞을 수밖에 없다는 듯이.
처음 만나는 데도 주저함이 없는 희수를 신기해하고, 머리카락을 넘기는 손과 귀,
꼼꼼하게 매듭을 푸는 둥근 손가락에 눈길이 간다. 뾰족하고 날카로운 선우의 세계에 동그랗고 하얀 것들이 말을 건다.
백 번 잘하다가 한 번 실수하면, 그 한 번 실수 때문에 바로 쪽날 수 있는 곳이야.(강사장의 대사)
강사장의 경고는 선우를 향해 있었다.
모욕적인 후반부
강사장이 보낸 사람들에게 납치된 선우는 그 후로 냉정한 선우가 되어 강사장의 목을 죈다. 강사장의 눈을 피해 총을 구하고, 체육관에서 백사장과 대치하는 장면들에서 선우의 가감없는 액션이 빛을 발한다. 다부진 이병헌의 몸과 턱선, 중저음의 목소리는 더욱 멋진 액션 장면들을 완성한다. 초조하지만 초조해하지 않고, 오직 목표만을 향해 나아가는 선우의 집요함은 영화를 압도하고, 어두운 조명을 활용한 영상미는 관객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선우의 삶이 더 비극으로 가는 걸 알지만, 후반부의 아름다운 영상미는 이런 선우의 삶을 더욱 비극적으로 보여준다.
강사장과 1대1로 대치하고 있는 장면에서는 절제된 대사와 분위기로 이 영화를 더욱 세련되게 만들어준다. 느리고 선명한 총소리는 선우의 머리를 관통하고, 선우는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다. '돌이킬 순 없다'는 그의 마지막 말처럼.
이 영화를 연출한 김지운 감독은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주인공이 어느 정점에 이르면, 멈출 수도, 걷잡을 수도 없이 휘몰아치듯 결말로 향해가는 것이다. 이병헌이 버려진 후, 강사장에 대한 복수를 향해 휘몰아치듯 말이다. (신민아의 존재감은 사라진지 오래)
돌이킬 수 없는 일
이 영화는 김지운 감독이 <조용한 가족>, <반칙왕>, <장화, 홍련> 이후, 메가폰을 잡은 네 번째 작품으로 이때부터 이벙헌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악마를 보았다>로 이어져 쓰리콤보를 달성한다. 그는 화려한 미장센으로 유명한데 상황에 맞춰 조명과 미술, 동선을 사용하여 현장의 느낌대로 유연하게 연출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의 영화는 알 수 없는, 혹은 알아채지 못하는 무언가를 두고 갈등하는 인물을 등장시킨다. 이 영화에서는 선우가 그 혼돈의 중심에 있는 인물인 것이다. 이미 스며들기 시작한 마음이 무엇인지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에 멈출 수 없고, 자신에게 닥친 위협을 끊어내기 위해서 폭력을 멈출 수 없는 선우의 분투가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더 처연하고 비극적으로 느껴지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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