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어보 2021
벗을 깊이 알면 내가 더 깊어진다.
<자산어보>는 이준익 감독이 <변산>이후 3년 만에 내놓은 작품으로, <왕의 남자> <사도> <동주> 등 시대극을 잇는 작품으로 꼽힌다. 이준익 감독의 작품은 역사적인 고증의 유무논란이 가려질 정도로, 기존의 대중적 역사인식과는 구별된 학계의 정통 이론을 기반으로 재해석한 작품들이 많다. 철저한 역사적 고증을 거치면서도, 일반 대중들에게 보여진다는 상업적 특성을 십분 활용하여, 대중이 이해하기 쉽게 대사나 용어를 설정한다.
이 영화에 나오는 정약전과 장창대라는 인물의 관계와 이야기는 모두 창작이다. 영화 첫 장면에서 <자산어보>의 서문을 바탕으로 만든 창작물임을 밝히면서, 약전과 창대의 이름만 가져왔을 뿐,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이야기들은 만들어진 것임을 알려준다. 이준익 감독은 그 당시 약전이 유배지에 갈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상황과 창대의 처지를 활용하여 당시에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두 사람이 나눈 우정과 화합을 이야기하고 있다. (*스포 있습니다.)
자산어보가 탄생하기까지(줄거리)
정조 시기에 벼슬을 지냈던 정약전은 정조의 승하 이후, 서학에 심취해 있다는 이유로 흑산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그곳에서 만난 창대는 상놈이지만 바다동물에 대한 지식이 탁월했고, 약전은 해양동물에 대한 책을 쓰기로 결정한다. 서학으로 유배오게 된 약전을 가까이 하지 않던 창대는 약전의 도움을 받게 되고, 물고기에 대한 지식을 전해주게 된다. 아울러 자신의 책읽기에 도움을 주는 약전을 선생님으로 모신다. 한편, 창대는 양반의 서출이었는데, 책읽기를 계속 했던 이유는 벼슬을 해서 출세하기 위해서였다. 후에 창대의 야심을 알게 된 약전은 실망하지만, 창대는 친부를 찾아 벼슬길에 나가게 되고, 그곳에서 마주한 충격적인 현실에 모멸감을 느끼며 다시 약전을 찾는다. 그러나 약전은 이미 죽은 후였고, 그가 남긴 편지를 통해 창대는 후회의 눈물을 흘리고, 다시 자산에서 살아갈 힘을 얻는다.
영화적 장치들
사극은 화려하잖아요. 화려함이 주는 즐거움이 있지만
단순함이 주는 강렬함이 있다고.
그 사람의 본질이 도장으로 찍듯이 보여요.
-이준익 감독, DAZED KOREA인터뷰 중
시대극은 어떤 사건이나 인물에 집중하여 스토리를 그리는데,이준익 감독은 그 시대를 반영하고 근대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정약전을 꼽았다고 한다. 그는 흑백화면의 단순함이 인물을 명확하게 그려내는 데 도움을 준다고 확신한다. 실제로 영화에서 드러나는 역동성은 바다의 파도 정도일 뿐, 비린내가 날 것 같은 생선의 거대함도 크게 자극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흑백의 단순함이 나타난다. 약전이 머무는 가거댁의 집은 대청마루와 방이 굵은 대들보로 나뉘어져 있는데 각각의 자리에 있는 인물을 한 화면에 담으면서, 정서적 신분적 거리를 드러낸다.
한편의 수묵화같은 영화라는 평을 받은 <자산어보>의 커다란 흑백 프레임에서 하늘의 별을 보는 장면과 파랑새와 흑산도의 모습만이 컬러로 표현하는데, 하늘의 별을 보며 창대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인 것을 깨닫는 것이고, 파랑새 장면에서는 약전의 독백이 나오는데 지식이자 양반이 굳이 어부 창대에게서 들었다는 구절을 넣어 자산어보를 썼다. 양반으로서의 습관이 남아 있지만 수평적 가치관을 가진 약전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부분으로 파랑새는 창대를 의미한다고 한다.마지막 흑산도는 처음의 흑산과 달라졌다는 의미로 컬러를 입혔다고 한다.(이준익 감독 Star News 인터뷰 인용)
새로운 세상을 꿈꾼, 약전과 창대
창대는 상놈이지만 벼슬을 해서 출세하기를 원한다. 이것은 창대가 정약용을 만난 후에 급격하게 드러난다. <목민심서>를 집필하며 지방 수령이 지켜야할 지침을 쓴 약용을 만난 창대는 자신은 백성을 똑바로 통치할 수 있다는 포부를 안고 친부를 찾아간다. 그에게 새로운 세상은 물질하는 삶을 벗어나 벼슬을 하며 양반노릇하는 것이다. 그것도 똑바로.
약전은 천하 인재로 소문난 사람으로, 임금 곁에서 벼슬까지 했다. 그가 꿈꾸는 세상은 상놈, 평민, 양반, 임금도 없이 평등한 세상이다.
모습은 다르지만 이 둘은 공통점이 있다. 둘다 호기심이 많다는 것과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는 것.
창대는 대학, 논어와 같은 책에 관심이 많고, 약전은 생물과 그 쓰임새에 관심이 많다. 둘의 위치는 다르지만 세상을 새롭게 바꾸고 싶어하는 마음만큼은 같다. 차이가 있다면 약전은 이미 겪은 이상만을 쫓는 성리학의 뜬구름을 알고, 성리학의 실제에 염증을 느꼈다면, 늘상 물고기만 잡으며 사물의 쓰임새에 도가 튼 창대는 이상적인 나랏일을 펼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같지만 달랐던 둘은 창대가 세상의 쓴맛과 벼슬의 추악함과 이상의 허무함을 맛본 후, 약전이 세상을 뜨고 나서야 한 마음이 된다.
흑산을 더 이상 흑산으로 부르지 않게 되었을 때에야 '자산'의 삶을 산 약전과, '자산'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 창대가 보인다. 둘은 자산으로 연결된 것이다.
자산어보의 탄생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
내가 이제까지 성리학, 노자, 장자, 서학 가리지 않고
공부한 것은 한마디로 사람이 갈 길을 알고자 했던 것인데
이놈이 물고기에 대해 아는 것만큼도 알아낸 게 없지 않은가?하여 이제부턴 애매하고 끝모를 사람 공부 대신
자명하고 명징한 사물공부에 눈을 돌리기로 했네.
사물로 나를 잊어 볼 생각이네
-약전의 대사 중
약전은 소나무에도 세금을 매기기 때문에 어린 소나무를 파내는 가거댁을 보고서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창대는 진사가 되어 세금을 과하게 거두는 아전을 나무라고, 어린 핏덩이에게 군포를 매기는 것을 부당하게 여긴 아기의 아버지가 참담한 일을 당하는 것을 직접 보게 된다. 약전과 창대의 삶은 서로 반대로 향해 있어, 서로 꿈꾸는 세상을 향해가려고 할수록 두 인물의 특징들이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약전은 학식이 높은 인재로 사람의 갈 길을 알고자 했던 길에서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유배자의 처지로 전락하게 된 스스로를 잊기 위해 '자명하고 명징한' 어류를 조사하고 기록한다. 서학을 추구하면서도 사람의 목숨 앞에서는 배교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고, 죽음을 자초하는 일을 막기 위해 이상적인 신념 따위 바꿔버리기도 한다. 임금도 없는 모든 사람이 평등한 세상을 꿈꾸면서도, 이런 생각을 드러내는 순간 자신의 가족들이 무사하지 못할 것을 알기에 마음에 묻어둔다. 이상을 펼치는 것은 이 삶을 중단하게 만들지만, 사물의 쓰임새는 지금 나를 살아있게 만든다.
반면, 창대는 약용을 만난 이후, 자산어보보다 목민심서의 길을 택하겠다며, 스스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원대한 꿈을 품고, 양반 아버지를 등에 업고, 출세하기 위해 떠난다. 그 안에서 겪은 창대의 환멸은 다시 '자산'으로 발을 돌리게 하고, 결국 우리가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실질적인 경험과 사물인 것을 보여준다.
우리에게 꿈꾸는 세상이란
학처럼 사는 것도 좋으나
구정물 흙탕물 다 묻어도 마다 않는 자산 같은 검은색 무명천으로 사는 것도
뜻이 있지 않겠느냐
-약전의 편지
배운대로 못 살믄 생긴대로 살아야지라
-창대의 말
창대는 자산어보의 책에서, 자신에 대한 약전의 편견없는 애정이 묻어나는 서문을 보고 눈물을 흘린다. 약전이 유배를 오며 느꼈던 무서움이 창대를 만나 사라지게 된 것과 호기심을 회복한 것과 '음험하고 죽은 검은색 흑산이 아니라 그윽하고 살아있는 검은색 자산'을 발견한 것을 고백한다.
누구보다 이상적인 세상을 꿈꿔왔지만 그 이상을 실현하기에는 너무나 먼 현실을 직시하며, 스스로 가지고 있던 본연의 삶으로 돌아가 삶을 누리던 약전과 그를 스승으로 모시며 그의 가르침에 따라 '자산'으로 돌아가는 창대의 모습은 지금도 우리가 어떤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부정부패나 비리들을 척결하기 위해 항거하고 투쟁하는 것이 무리라는 것이 아니다. 현실의 부조리함을 바꾸는 것은 성리학이나 공자나 맹자의 학문이 아니다. 그것은 각개인의 양심에서부터 시작되는 것들이 분명 작용해야 한다. 약전은 사람의 양심과 본질을 공부하기 위해 서학에 많은 관심을 가졌을 지도 모르겠다.
똑똑하지 않아서, 특별하지 않아서 말하지 않고 숨죽여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꿈꾸는 미래가 있다. 우리 앞에 놓인 소중한 것들을 놓치지 않고, 함께 누리며 살아가는 삶의 소중함을 깨우쳐주는 아름다운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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